이별의 습관들

고양이 깻잎이가 급격하게 마르고 있다. 가장 가벼운 차림으로 떠나고 싶어서 그런거라고 이해하고 싶어도 이런 갑작스러운 전개는, 내가 모진 마음을 먹고 홀로 이사 나갔기 때문에 그리된 것 같다는 죄책감을 지우기가 어렵다. 올해로 열 여덟 살인 깻잎이는 이제 동물병원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고양이가 되었다. 의사 선생님이 무엇을 더 할 수는 없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마음이… Continue reading 이별의 습관들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거지

  사진 속의 친구들은 코로나가 유럽에서 기승을 부리는 지금- 독일의 국경이 폐쇄되어 베를린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거나, 베를린에 있지만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해야하니 만나지 못하는 이들이다. 그래서인지 사진 속 풍경이 그리 먼 과거가 아닌데도 벌써 그립다.   찍을 때 이렇게 나오면 좋겠다 싶었는데 그대로 현상되어 마음에 드는 사진   지난 2월 베를린 공대 주차장에 J와 T의… Continue reading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거지

장바구니를 통째로 잃어버림

M에게 떡볶이를 만들어 주려고 아시아마트에서 모든 장을 본 후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트램을 타고 한없이 외곽동네로 들어가다 무언가를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오른손에 들고 있던 장바구니가 사라진 것을. 그런 적은 처음이라 믿고 싶지 않아서 침착하게 배낭을 살펴본 뒤 머리에 열이 있는지 확인했다. 열이 나는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가 훔쳐 간 것도 더더욱 아니고. 아마 10분 전쯤… Continue reading 장바구니를 통째로 잃어버림

당신을 지목하는 손가락

베를린의 국제 여성의 날(Internationaler Frauentag)은 대규모 집회로 도시가 떠들썩하다. 올해는 총 다섯 개의 구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친구 C의 초대로 바샤우어 다리(Warschauer Brücke)에서 열린 집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갔다가 현장이 무척 흥미로워서 집에 돌아와 기사를 찾아보니, 라틴아메리카 여성 인권단체가 주최한 스페인어로는 'Un violador', 한국어로는 '강간범'이라는 타이틀의 집회였다. 그래서 칠레의 독재 정부와 멕시코에서 매일 일어나는… Continue reading 당신을 지목하는 손가락

아까 도망치던 거 생각나

책장을 정리하다가 윤장섭 교수님의 <한국 건축사>를 발견했다. 대전대학교 다닐 적에 전공책이었는데 나에겐 그 시절을 대표하는 물건이라 독일에 넘어온 후에도 여러 번 이사했지만 늘 가지고 다녔다. 바래진 표지를 보고 있으니 십 년 전의 향수가 밀려와서 어느새 나는 선 채로 책을 펼쳐보고 있었다. 수업 중에 받아쓴 필기는 딱 1학기 분량만큼 의욕이 넘쳤다. 장을 넘길수록 흐지부지하더니 나중에는 읽는 것도… Continue reading 아까 도망치던 거 생각나

정말 문학은 그런 건가요?

문학동네 100호 특별부록 <아뇨, 문학은 그런 것입니다>를 읽고 생긴 물음이다. 부록의 제목은 다행히 출판사가 붙인 모양으로, 거창한 표지를 넘기면 '나에게 문학이란?' 이라는 거대한 물음에 답을 해야 했던 작가들의 투덜거림이 귀여웠다. 어떤 작가는 출판사에 대놓고 '나는 그런 거 모르오!' 혹은 '왜 그런 질문을 하시나요, 무례하시네요.' 라고 하는 것 같아서. 중견 작가부터 갓 등단한 신인까지, 100명의 서로 다른… Continue reading 정말 문학은 그런 건가요?

함께 태어난 어리석음에 대하여

'함께 태어난 어리석음'이라는 말이 몇 달째 머릿속에서 맴돈다. 처음부터 무시하려고 애썼으나 지금까지 계속 나를 따라오는 걸 보면 블로그에라도 써야 잊힐 것 같다. 딱히 무슨 의미인지는 나도 모르겠으니 그냥 잊을 수 있다면 잊고 싶은 심정이다. 동명의 제목을 가지고 글을 써보려 했으나 일기장에 숨겨야 하는 부끄러운 번뇌가 줄줄이 튀어나왔다. 번뇌를 내보인 후에는 열심히 자기변호도 해야 하고, 그러다… Continue reading 함께 태어난 어리석음에 대하여

마리아를 겨눈 총구

경찰차 행렬이 그룬베어거 슈트라세 (Grünberger Straße)와 바샤우어 슈트라세 (Warschauer Straße)의 교차로로 꾸역꾸역 터져 나오는걸 목격한 건 1월 마지막 주의 어느 날이었다. 아스팔트가 비에 완전히 젖어 경찰차의 헤드라이트의 노란 불이 도로에 천천히 번졌다. 그 모습에 나뿐만 아니라 다른 행인들도 경찰이 통제하는 데모 행렬에 관심을 보였다. 경찰이 데모라도 하나 싶을 정도로 경찰차 수가 많았다. 데모의 진행 방향도… Continue reading 마리아를 겨눈 총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