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근황

  냉장고 한쪽에 아기 고양이용 우유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거 깻잎이가 먹던 건데 어떡하지? 하고 몇 번이나 우리 손에 들렸다가, 다시 냉장고로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우유 팩. 그걸 마시던 깻잎이가 떠나고 두 달이 지났다. 깻잎이가 숨쉬기를 멈추고 나서도 우리는 한동안 깻잎이의 빈 껍데기에 대고 이름을 불렀는데 근육이 굳어도 털은 윤기가 반지르르하게 흘러서 자꾸자꾸 손이… Continue reading 그녀의 근황

간섭 없는 공원에서

 어쩌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얼굴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이번 봄은 공원에 들어설 때마다 그런 막연한 생각을 하며 보냈다. 록다운으로 썰렁한 시내와는 대조적으로 템펠호프 공원은 살랑이는 바람에 강아지풀이 눕는, 그야말로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다. 모두가 햇살을 즐기려 각자의 창문을 넘어 공원으로 쏟아졌는데, 피크닉을 즐기는 아이들은 공중에 연을 날렸고, 온몸이 타투인 커플도 롤러스케이트를 타다 넘어져도 즐거운 듯이 웃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나는… Continue reading 간섭 없는 공원에서

존재의 아름다움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는 독일 내 전염병 감염자 수와 그에 대응하려는 독일 정부의 규율이 라디오 주파수를 통해 우리 집 주방까지 처들어와서는 눈치 없이 떠들던 4월이었다. 앞으로 이 시기를 그렇게 기억할 것 같다. 어느 대도시에서 하룻밤 새 수천이 죽었고, 감염되지 않으려면 마스크를 해야 하니 마니, 불길한 말을 주고받는 게 이성적인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그런 뉴스를 듣고 있으면… Continue reading 존재의 아름다움

말, 글, 춤

어떤 마음은 떠오르는 즉시 근처에 있는 단어로 문장을 만든다 해도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 그런 마음은 애석하게도 말로 설명하려고 할수록 멀어졌다.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허무히 사그라드는 불빛처럼,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며 원망하기도 했다. 한동안 괴상한 침묵을 버티며 언젠가는 그 마음이 글로 표현되기를 기다렸다. 사실은 말도 글도, 입술과 손가락을 벗어나면 다 자유로운 것인데! 그걸… Continue reading 말, 글, 춤

이별의 습관들

고양이 깻잎이가 급격하게 마르고 있다. 가장 가벼운 차림으로 떠나고 싶어서 그런거라고 이해하고 싶어도 이런 갑작스러운 전개는, 내가 모진 마음을 먹고 홀로 이사 나갔기 때문에 그리된 것 같다는 죄책감을 지우기가 어렵다. 올해로 열 여덟 살인 깻잎이는 이제 동물병원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고양이가 되었다. 의사 선생님이 무엇을 더 할 수는 없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마음이… Continue reading 이별의 습관들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거지

  사진 속의 친구들은 코로나가 유럽에서 기승을 부리는 지금- 독일의 국경이 폐쇄되어 베를린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거나, 베를린에 있지만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해야하니 만나지 못하는 이들이다. 그래서인지 사진 속 풍경이 그리 먼 과거가 아닌데도 벌써 그립다.   찍을 때 이렇게 나오면 좋겠다 싶었는데 그대로 현상되어 마음에 드는 사진   지난 2월 베를린 공대 주차장에 J와 T의… Continue reading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거지

장바구니를 통째로 잃어버림

M에게 떡볶이를 만들어 주려고 아시아마트에서 모든 장을 본 후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트램을 타고 한없이 외곽동네로 들어가다 무언가를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오른손에 들고 있던 장바구니가 사라진 것을. 그런 적은 처음이라 믿고 싶지 않아서 침착하게 배낭을 살펴본 뒤 머리에 열이 있는지 확인했다. 열이 나는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가 훔쳐 간 것도 더더욱 아니고. 아마 10분 전쯤… Continue reading 장바구니를 통째로 잃어버림

당신을 지목하는 손가락

베를린의 국제 여성의 날(Internationaler Frauentag)은 대규모 집회로 도시가 떠들썩하다. 올해는 총 다섯 개의 구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친구 C의 초대로 바샤우어 다리(Warschauer Brücke)에서 열린 집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갔다가 현장이 무척 흥미로워서 집에 돌아와 기사를 찾아보니, 라틴아메리카 여성 인권단체가 주최한 스페인어로는 'Un violador', 한국어로는 '강간범'이라는 타이틀의 집회였다. 그래서 칠레의 독재 정부와 멕시코에서 매일 일어나는… Continue reading 당신을 지목하는 손가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