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과 2022년 사이

2021년 10월, 바르셀로나 해변에서 외딴섬에 갇힌 표류자가 그저 밀려오는 파도를 관망할 수밖에 없듯이 혼자 유튜브 영상을 켜 놓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이 잦았다. 그러다 어느 날은 김강과 수다를 떠는데, 내 입에서 나온 모든 이야기의 출처가 유튜브였다는 점을 자각하고는 수치심이 들어서 엉엉 울었다. 설마 북적북적한 사람들 속이 그리운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유튜브 링크를 보냈다. 지금은… Continue reading 2021년과 2022년 사이

숲길

지난 6월, 우리는 브란덴부르크 템플린(Templin, Brandenburg)행 기차에 자전거 두 대를 실어 여행을 떠났다. 템플린에 도착한 우리는 목적지인 보이첸부르크(Boitzenburg)까지 자전거로 이동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꽤 무모한 계획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야 브란덴부르크의 넓은 들판을 양쪽에 끼고 달리는 게 즐거웠지만 그것도 잠시, 두 세 시간만에 금방 체력이 고갈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쭉 가로등이 없는 국도라서 어둑해지기 전에는 마을에 들어가야 했다.… Continue reading 숲길

하고싶은 인터뷰

이름 : 무스코사 (Muskosa) 나이 : 2007년생 14살 출신 : 한국 충남 계룡산 깊은 골짜기 <무스코사에게 궁금한 점 열가지> 가끔 부엌에서 혼자 자고 싶어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나중에 무지개 다리를 건널 때 깻잎이 오빠처럼 집에서 조용히 가고 싶은지 아니면 병원에서 편안하게 가고 싶은지?고양이는 귀신을 볼 수 있다던데 진짜인지?우리와 함께 사는데 불편한 점이 있다면?고향을 떠나 먼… Continue reading 하고싶은 인터뷰

2020/21년 록다운의 겨울

독일 정부가 코로나 방역과 백신 접종 시도에 족족 실패하는 동안 겨울이 다녀갔다. 이번 겨울은 유독 눈이 많이 내렸는데 창가에서 하얗게 변신하는 동네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곤 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동안은 새도 울지 않고, 자전거 탄 사람도 없고, 산책하는 가족도 없으며, 오로지 맞은 편 집 테라스에 나와 눈구경하는 노인들밖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으로… Continue reading 2020/21년 록다운의 겨울

2020년과 2021년 사이

2020년 여름, 장보러 가는 길에 김강과 나 . 전염병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자연스럽게 설명하기 어려운 한 해였다. 이전처럼 우연을 기대하며 미지근하게 살다가는 코로나에 감염되기 전에 어쩌면 미라가 되어 발견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만나려면 연락을 먼저 하거나 연락이 와야 했다. 그래서 결국 만나면 어색한 몇 미터 거리를 두고 상투적인 안부를 주고받았다. 친구가 최근 누구와… Continue reading 2020년과 2021년 사이

X의 정체

이번 학기에 청강하는 과목들은 전반적으로 정체성(Identität)에 관한 세미나가 많은데, 강의명만 나열해봐도 이렇다. 정체성과 건축(Identität und Architektur), 정체화와 정체성(Identifikation und Identität), 젠더와 다양성(Gender und Diversity). 마치 이 혹독한 겨울학기가 지나고 비로소 봄이 오면 '그래서 자네는 정체성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는 똑 소리 나게 대답할 줄 아는 대학생이어야 할 것만 같다. 모든 수업이 비대면으로 진행되는 와중에도 다들 처음에는… Continue reading X의 정체

줄넘기

2018년 봄 나는 우리의 연애가 단체 줄넘기와 닮았다고 종종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의 몸이 달라서, 다른 세대라서, 다른 전공에 몰두하고 있어서, 다른 목소리를 내서, 다른 영혼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이유로 물러선 만큼 길어진 줄넘기와 텅 빈 운동장이 자꾸만 떠오른다. 한산한 운동장에 널찍하게 서서 붕붕 돌리기 시작한 단체 줄넘기. 그 사이로 고양이 두 마리가 유연하게 넘나들기도, 예쁜… Continue reading 줄넘기

1-5번 무한루프 속에서

지난주 일요일 밤에는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다가, 한 남성이 홀로 "자유(Freiheit)"를 애타게 외치는 모습을 보았다. 그에게는 자유가 마치 잃어버린 강아지 같은 것인 듯, 골목 하나하나 포기하지 않고 목이 쉬도록 불러제꼈다. 게다가 그의 손에는 기다란 각목이 야무지게 들려 있었는데, 그 투박한 나무토막 끝에 기름불이 아슬아슬 사선으로 일렁이는 게, 정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처량하고 또 그래서 위험해… Continue reading 1-5번 무한루프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