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배신

Untitled (13)

어제는 한 장편소설의 도입부를 읽다 몇몇 표현에 비위가 상해 견디질 못하고 그만 E-book 창을 닫아버렸다.

 “그러니까 투덜거리며 뛰쳐나오는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사정없이 뺨을 후려갈긴 뒤 다시 방안으로 집어넣은 것은 나로서는 너무나 정상적인 행동이었다. 내 행동이 조금 난폭했는지는 모르지만 문을 열고 뛰쳐나오다니!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그녀가 아닌가. 그녀가 내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을 줄 몰랐고, 또 자신을 향해 난폭하게 주먹을 날릴 줄도 몰랐으리라. 그녀는 황당해했고, 곧 내 눈초리에 겁을 먹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한적한 변두리 여관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그제야 그녀의 마음을 졸아들게 하는 모양이었다.” 이승우 <식물들의 사생활> 문학동네

소설 읽기를 포기한 후에는 깊은 실망감을 떨치기 위해 오랫동안 동네를 거닐어야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토록 기대했던 이승우 작가님의 소설이 이렇다니. 잠시나마 선생님에게 품었던 존경의 마음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작년에 이승우 작가님의 문학동네 100호 기고 글 <나는 나 외에 아무도 대표하지 않는다>를 처음 읽고 위로 받아 흘렸던 눈물. 그리고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용기를 얻었던 마음이 저 폭력적인 문단 하나로 순식간에 멍들었다. 차라리 작가님이 ‘나는 아무도 대표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더라면 조금은 덜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소설을 완독할 수 있었을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읽어볼지도 망설였지만, 위의 문단에서 황당하게 주먹질 당한 저 여성은 내가 기대하는 방식으로는 앞으로 등장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서를 방해하는 건 화자의 자의식이었다. 화자에게 두껍게 씌워진 성난 마초 자의식은 2020년에 읽기에는 그저 징그러울 뿐이다. 어떤 심오한 이유를 갖다 붙여도 혐오를 아름답게 읽지 않는 시대니까. 어머니의 귓가에 아들이 얼굴을 바짝 붙여 ‘으르렁’거린다는 묘사는 나에게 예술이 아니다. 그저 못난 사람이 꼴깞 떠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여자를 괴롭히는 하찮은 남자가 자기변명을 그럴듯하게 늘어놓다가- 있지도 않을 출구를 만들어 도망가 버리는 이야기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도입부에서는 어떠한 매력도 느끼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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