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의 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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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는 온전히 글을 쓰고 싶어서 일의 효율을 계산하며 산 지 8주가 지났다. 그러니까 주말은 이야기에 온전히 침식해야 하니까, 일상의 걱정이나 불안을 가져가면 안 되니까, 미리 정돈된 월화수목금을 살아두는 것이다. 이건 주말에 누가 놀자고 하면 베를린에 없다고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는 정도로 중요했다. 토요일 아침 새벽부터는 미루어두었던 글을 읽느라 혼자 부산을 떨었다.

고작 8주를 학업과 문학을 병행한 것뿐인데 어젯밤부터 정체불명의 갑갑함이 나를 잡아끌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김강에게 답답하다는 말을 했다. 뭐가? 하고 김강이 되물었지만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깻잎이가 부족한가? 포옹이 부족한가? 마그네슘이 부족한가? 아니면 그저 갈증이 나는 것뿐일까. 시원한 수돗물을 삼키면 해소될까. 

평일에는 내 몸 어딘가에서 하얀 자전거용 헬멧이 덜그럭거린다. 도시락통에서 반찬이 새어 나와 갈색으로 물든 하얀 천 가방도 자주 내 몸을 툭툭 친다. 학교 복도에 T를 기리는 화병을 가꾼다. 또 떨어진 꽃잎을 모아 목조건축 백과사전에 납작하게 말려서 언젠가 넉넉하게 모이면 무언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화장실에서 완전히 시든 꽃을 정리하고 화병의 물을 갈고 있으면 T를 모르는 애가 다가와 T가 누군지를 묻는다. 내가 화병에 ‘T를 기억하며’라고 써 놓았기 때문이다. 내가 쓴 글에 이유를 묻는 사람은 피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냥 -응. 그런 사람이 있었어, 하고 세면대에 붙은 누런 이파리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대꾸하면 이름을 모르는 애가 -슬픈 일이네. 그래도 이렇게 꽃을 놓아서… ,하고 말끝을 흐린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독일인도 말끝을 흐릴 줄 아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끝을 흐리는 습관은 좋지 않다고 끝까지 또렷하게 말하기를 강요하지만 나는 말끝을 적당히 흐리고 웅얼거리는 게 나쁜 건지 모르겠다. 어떤 말은 끝까지 말하지 않아야 적당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어떤 날은 흐리고 어떤 날은 정오부터 이미 기운 해가 맞은편 건물의 창에 반사되어 눈을 찔렀다. 아팠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생기있어 보여 좋다고 말한다. 나도 하루가 생생해져서 좋다고 대답했다. 주말에 ‘부서지는 세계’에 들어가려면 평일에 건강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건강하지 않으면 ‘부서지는 세계’의 경계가 없어진다. 그런 건 앞으로도 조심하고 싶다. 나는 경계가 분명한 영역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살고 싶다. 

T를 함께 기억하는 친구들은 멀리서도 쳐다보면 눈이 바로 마주쳐지는 관계가 되었다. 눈에 서로를 당기는 자석이 달린 마냥. 그래서인지 자꾸만 엮인다. 어떤 토요일은 한 친구를 따라 베를린을 벗어나 서쪽으로 달렸다. 주말에는 부서지는 세계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하는 조바심을 작게 접어 고양이와 함께 두고 집을 나섰다. 우리는 조그마한 동네에 정말로 곧 부서질 예정인 집을 둘러봤다. 그리고 그 동네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와 인터뷰를 했다. 다 같이 하루 숙박을 하고 일요일에는 겨울바람을 거슬러 오랫동안 넓은 들을 걸었다. 평범하게 사람 사는 이야기를 했던 거 같다. 2주 후에, 나는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작은 캠코더를 학교에서 빌려 친구와 함께 다시 그 도시에 방문했다. 그녀가 무언가 벌이려 하고 있다. 나는 좋게 말하면 직관적인 사람으로서, 앞으로 3년은 그 친구의 작업에 휘둘릴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순순히 일이 진행되는 대로 몸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주말이 더 좁아졌다.

주말 저녁은 또 초대받기 좋은 시간대라 가야 하는 곳이 많았다. 좁게 둘러앉아 게임을 하고, 거친 요리와 물만 적시는 설거지를 방관하고, 나와는 취향이 다른 책장을 둘러보다 보면 주말 저녁이 달콤하게 지나간다. 그러고 나면 또 평일이다. 화요일엔 설계 크리틱이 있다. 교수님과 튜터가 내가 ‘최선을 다하는 척’을 하고 있다는 걸 아는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나는 내가 그린 도면이 좋다. 도면과 글 중에 뭐가 더 좋냐 물으면 곤란할 정도로 도면은 내게 좋은 그림이다. 그런데도 왜 네 도면은 형편이 없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도면을 그리는 나를 사랑하는 대신에 도면을 그리는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둘러댈 것 같다.

어떤 화요일에는 내가 설계 수업에 간 사이, 김강이 사랑니를 뺏다. 나는 잘 몰랐지만 김강은 내내 불편했던 모양으로 치과에서 온전한 두 개의 사랑니를 뽑아와 속이 시원하다 말했다. 그 사랑니는 내 엄지손가락만 하게 컸고, 또 피가 줄줄 흘러 주방의 싱크대에서 한참을 닦아내야 했다. 나는 속이 메슥거려 소리를 질렀다.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김강이 실존하고 있음에 소름이 돋았다. 그도 살점과 뼈와 피가 있는 동물이라는 걸. 커다란 사랑니가 싱크대 위에서 빙그르르. 피가 수돗물과 섞여 얼룩을 만들면서. 계속해서 살아있음을 각인시켰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나는 투명한 통을 씻어 말려놓고 하얀 털실을 가득 채워 가운데에 이빨을 넣어두라고 말했다. 완벽하게 세척할 수 없는 사랑니를 보고 있으면 내 앞의 이 사람이 연약한 동물이라는 게 실감 나기 때문이었다.  

지난 토요일에는 쓰고 있는 이야기를 프린트해봤다. A4용지로 48장이 나왔다. 그렇게 오랫동안 헤맸는데 정작 써야 하는 글은 단 한 줄도 못 쓴 느낌이다. 주말마다 애써 나에게 속을 내어 준 사람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어쩌면 나는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마음도 든다. 그래서 더 미안해 지기전에, 이들에게 두 번째 시련이 도달하기 전에 출력한 것이다. 그러면 이야기 속의 시간도 어느 정도 멈추니까.

목요일 자정, 손목시계가 지금의 시간을 가늠한다. 45분 후에 수업에 들어가려면 노트북을 닫고 계산을 해야 한다. 어젯밤부터 나를 괴롭히던 게 잠시 카페에 앉아 쓴 7백개의 단어로 배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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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ought on “여덟 번의 주말”

  1. “어떤 말은 끝까지 말하지 않아야 적당하다” 공감합니다.
    얼마전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에서 상대방에게 말끝을 흐리는 버릇이 있다고 트집잡는 구절이 나옵니다. 밉게 보는 상대의 모든 것이 다 마음에 안들게 보이는 그런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겠죠?
    매번 흐리는 것도 좋지 않아 보이긴 하지만, 때로는 많은 것을 함축할 수도 있고 생략을 통해 편하게 누그러뜨리는 효과도 있을테니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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